모든 시선이 송유리에게로 쏠렸다.
방 안의 분위기는 마치 한밤중의 묘지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송유리는 분명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 시선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윽고 자신을 향한 그 남자의 위험한 시선이 피부 위를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다 나가.”
고인성의 단호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그제야 방 안에는 비로소 소리가 흘렀다.
많은 사람이 움직였지만 들리는 건 발소리뿐이었다. 심지어 숨소리조차 삼킨 채, 그들은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을 보는 듯 송유리를 바라봤다.
황이진이 입을 열려는 순간,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 두 명이 그녀를 조용히 끌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은 텅 비었고 이제 남은 건 고인성과 송유리뿐이었다.
“이리 와.”
명령조의 차가운 목소리에는 거부할 여지가 없었다.
송유리는 슬쩍 고인성을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에서 감정의 흔적을 읽어내려 했지만,
무표정한 얼굴은 화도 실망,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송유리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먼저 입을 열어 침묵을 깨뜨렸다.
“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
“그날 밤 대표님과 하룻밤 보낸 거 말이에요...”
“...”
고인성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번에 잡아챘다. 예상치 못한 강한 힘에 중심을 잃은 송유리는 그대로 그의 무릎 위에 앉아버렸다.
머릿속엔 고인성이 황이진에게 했던 행동이 스쳐 지나갔다.
‘고인성의 무릎 위에 앉는다고? 이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인데!’
송유리는 당장이라도 일어나려 했지만, 허리에 닿은 그의 손이 그녀를 단단히 붙잡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이지 마.”
고인성의 차가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그러자 송유리는 마치 명령받은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고인성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의 숨결이 송유리의 피부 가까이 닿을 때마다, 그녀의 온몸에 작은 전율이 일었다.
그는 마치 시간을 잊은 듯, 조용히 그녀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그날 밤, 자신이 충동에 휩쓸린 이유가 단순히 외부의 영향일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향기를 다시 맡으며 깨달았다.
‘그날 밤 나를 미치게 만든 건 향수나 최면 같은 것이 아니라, 이 여자였어.’
단지 그녀라서, 그토록 순수한 그녀라서, 마치 그의 본능 깊숙이 각인된 존재처럼 본능적으로 끌렸던 것이었다.
송유리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체온이 온전히 그녀에게 스며들자,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지만,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마스크를 벗겨냈다.
그 순간, 그녀의 본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려졌던 모든 감정과 진심까지도 투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고인성의 표정에는 전혀 놀라움이 없었다. 오히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익숙하고도 따뜻한 눈빛이었다.
“혹시...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요?”
그의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송유리는 갑작스러운 따스함을 느꼈다. 어느새 그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감싸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따뜻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 포개졌다.
“엇...”
송유리는 애써 흔들리는 이성을 붙잡으려 했지만, 점점 힘이 빠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따스한 숨결이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그의 손길은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마치 시간을 멈춘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손이 그녀를 살며시 밀어냈다.
송유리는 눈을 깜빡이며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맑은 눈동자에는 이해할 수 없는 혼란과 당혹감이 가득했다.
고인성은 잠시 숨을 고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엉켜 있었지만,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미안해. 방금은 내 실수였어.”
그녀는 살짝 입술을 비죽이며 손등으로 그의 흔적을 쓱 닦아냈다.
‘입 맞출 때는 실수인 줄 몰랐나? 이제 와서 실수라고?’
“혹시... 실망했어?”
“아니요.”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가 토라진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잖아.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고인성은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혹시... 그 여자가 시킨 거야?”
송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애초에 그쪽에서 오해하신 거잖아요. 이진 언니는 제 소중한 친구예요. 저는 언니를 해칠 수 없었어요.”
“필요 없어요.”
“10억?”
“싫다니까요!”
송유리의 눈동자에 단단한 고집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고인성은 비로소 장난을 멈췄다. 그는 송유리의 흔들리지 않는 태도에 놀란 듯해 보이는 한편으로는 그녀의 진심을 느낀 듯했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엉켜 있었다.
“알겠어.”
고인성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마치 항복이라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른 제안을 할게.”
그는 송유리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 손길은 다정했지만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나랑 결혼해.”
“네?”
송유리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의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그의 말을 제대로 들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지만, 전혀 현실감 없는 말이었다.
‘고인성 대표가... 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장난하는 거겠지?’
“제가 잘못 들은 거겠죠?”
고인성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나랑 결혼해 줘. 집에서 자꾸 재촉하니까 서둘러 결혼할 여자가 필요해.”
송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사람이 필요하면, 다른 사람을 찾으세요. 저는 전혀 생각이 없어요.”
“매달 생활비로 2억 원 줄게.”
“그래도... 저는...”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손을 빼내며 말했다.
“우리는 서로 잘 알지도 못하잖아요. 결혼이라니, 너무 성급해요. 저는 결혼 할 생각 없어요.”
송유리는 그날의 기억만 떠올려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목을 움켜쥐며 악어 연못에 던져버리겠다는 고인성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아무리 고인성이 잘생기고 매력적이라도, 목숨을 담보로 결혼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가 제안한 결혼은 오로지 그에게만 이득이 되는 거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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