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를 기다리며 잠시 멈춰 선 차 안, 고인성은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그때 조수석에 앉아 있던 송유리가 불쑥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근데 인성 씨, 아까까지만 해도 밤에 돌아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오후에 벌써 온 거예요?”
“시찰 끝나고 회의가 갑자기 취소돼서 그냥 들어왔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딘가에서 여전히 비행기 안에 있을 명서원의 얼굴이 떠오를 법했다.
기업 총수가 갑자기 빠지면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언제나 비서실장의 몫이니까.
고인성이 자리를 뜨는 순간, 그 모든 책임은 명서원이 떠안아야 했다.
정말이지, 고된 ‘을’의 삶이었다.
고인성의 말에 송유리가 다시 물었다.
“근데 어떻게 제가 오늘 연극 무대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총장님이 초대하셨어. 원래 안 가려다가... 마침 근처 지나가서 잠깐 들른 거야.”
그 말을 들은 송유리는 살짝 입을 삐죽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또 지나가다가? 인성 씨는 참 이상해. 그렇게 많은 우연이 어디 있다고... 항상 타이밍까지 맞춰서...’
항상 꼭 맞는 타이밍에 꼭 맞는 이유로, 묘하게 얄미웠지만 묘하게 고맙기도 했다.
적어도 오늘 자신이 준비한 무대를 함께 본 사람이 있다는 게 참 다행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송유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곡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고인성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지금 꽤 행복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고인성이 말을 꺼냈다.
“모레 시간 비워둬. 가족 모임이 있어.”
그 말을 들은 송유리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기대고 앉아 있던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지금까지는 혼인신고서 한 장으로 끝난 ‘계약’ 같았지만 이제 진짜 현실이, 본격적인 ‘미션’이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다소 긴장된 눈빛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실수 안 하게 잘할게요.”
고인성은 그런 그녀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그렇게까지 부담 가질 건 아냐. 별일 없을 거야.”
송유리는 작은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
집에 돌아온 송유리는 연극 의상을 벗고 샤워를 마친 뒤, 세탁실로 향했다.
송유리는 몇 번이나 약속을 시도한 끝에 겨우 그녀를 저녁 식사 자리에 불러낼 수 있었다.
둘이 고른 장소는 다름 아닌 송유리가 가장 좋아하는 샤브샤브 집이었다.
황이진은 메뉴판을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
“내가 한턱낸다니까, 좀 좋은 데 가자니까 고급 레스토랑은 싫다 하고. 너 진짜 기회 소중한 줄 모르는 것 같아.”
송유리는 웃으며 대답했다.
“비싼 데보다 맛있는 데가 최고죠. 여기가 제일 맛있어요.”
“그래. 오늘은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부담 갖지 말고.”
“그럼... 모든 메뉴 다 시켜도 돼요?”
“맘대로 해.”
송유리는 실제로 전부 다 시키진 않았지만, 고기 위주로 대부분 주문했다.
윤기 도는 고깃덩어리들이 접시에 놓이자,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음식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할 무렵, 송유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진 언니, 제가 요즘 주호진 선생님에 대해 좀 알아봤거든요... 사실 선생님 부모님, 생각보다 까다로운 분들 아니래요. 며느리한테도 조건 같은 거 안 따지고. 한 번만 진심으로 만나보는 건 어때요? 안 맞으면 그때 정리하면 되잖아요.”
‘주호진’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황이진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러고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유리야... 넌 몰라. 나랑 그 사람은... 절대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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