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리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 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침대에는 그녀 혼자뿐이었고 황이진은 아침 일찍 나간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침대 머리맡에 작은 메모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난 일자리 구하러 나가. 냄비에 찌개 끓여놨고 전기밥솥에 밥도 있으니까 데워서 먹어.]
송유리는 세수하고 간단히 준비를 마친 후, 따뜻한 밥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이렇게 아침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동안은 과자 몇 개로 허기를 채우거나, 배달 음식을 시켜 먹거나, 간단히 요리해야 했기에 시간이 꽤 걸렸었다.
비록 지금 황이진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누군가 자신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덜 힘들게 느껴졌다.
오후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 황이진이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일자리는 못 구했지만, 온수기 문제는 해결했어.”
“이렇게 빨리요?”
놀라운 속도였다. 황이진의 뒤에는 인테리어 작업을 하는 두 명의 작업자가 따라오고 있었고 그들은 새로운 온수기를 들고 있었다.
그 뒤에는 집주인이 서 있었는데, 송유리를 보자마자 불만을 터뜨렸다.
“온수기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참 까다롭다니까... 멀쩡하게 쓸 수 있는 건데 굳이 교체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자 황이진은 전혀 기죽지 않고 응수했다.
“본인이 가져가서 쓰세요. 유리는 돈을 내고 들어온 세입자예요. 왜 고장 난 온수기를 써야 하죠? 처음부터 그런 상태라고 설명했으면 유리 씨도 이 집으로 계약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런 식으로 사람을 속여 먹지 마세요.”
“아가씨! 온수기가 없는 것도 아니고, 뜨거운 물도 나오는데 뭐가 문제라는 거예요?”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없으니까 그게 문제죠! 얼른 교체하세요. 말해봤자 입만 아프실 거니까요!”
황이진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 집 월세가 자그마치 오십만 원이에요. 비협조적으로 나오시면 바로 나갈 겁니다!”
집주인은 마지못해 중얼거리며 작업자들에게 온수기를 빨리 교체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황이진은 송유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넌 먼저 출근해. 여긴 내가 잘 처리할게.”
“네! 언니!”
이 정도 일은 황이진에게 맡기면 마음이 놓였다.
송유리는 비트 타운에 도착해 근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평소와 같으면서도 어딘가 묘하게 달라 보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동료들과 크게 친하지 않았지만, 마주치면 인사는 나누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동료들이 그녀를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피했다. 대놓고 외면하거나, 혹시 눈이라도 마주치면 고개를 홱 돌리고는 빠르게 지나갔다.
모두 그날 밤 고인성과의 사건 이후 송유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멀쩡히 방에서 나왔다니, 절대 평범한 사이가 아닐 거야!”
“근데 상황이 좀 시끄러웠어야 말이지. 그럼 송유리가 고인성 대표한테 찍힌 건 아니란 말인가?”
“대기업 대표의 속마음을 누가 알겠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송유리는 너무 위험해. 멀리하는 게 상책이야!”
하지만 송유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맡은 일만 충실히 해냈고 시간을 지켜 출퇴근했다.
게다가 새 온수기로 바꾼 뒤로는 생활 퀄리티가 확실히 달라졌다.
황이진은 매일같이 일자리를 알아보며 바빴고 어느 정도 저축해둔 돈으로 송유리가 집에 돌아오면 과일이나 간식을 내어주었고, 식사도 자주 챙겨주었다.
요즘 송유리의 일상은 말 그대로 작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끔 그녀는 농담처럼 생각했다.
‘내가 남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예쁘고 따뜻한 이진 언니랑 결혼하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
그날 이후, 고인성은 다시는 비트 타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친구인 윤지훈은 여전히 비트 타운의 단골이었지만, 고인성이 오지 않는 한 1번 룸은 비어있었다.
곧 동료들은 입을 모았다.
“결국 별거 아니었네. 고인성 대표님도 딱 두 번 오고 나니까 흥미가 떨어졌나 보지. 고작 이 정도였어?”
게다가 룸 안에서 종이 폭죽이라도 터트렸는지, 크림에 붙어버린 색종이 조각들이 소파 틈새까지 잔뜩 끼어 있었다.
담배는 그대로 테이블 위에 눌러져 있고 물잔 속에도 꽁초가 둥둥 떠 있었다.
정말이지 ‘참혹하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송유리는 반박해 보려 했다.
“매니저님, 이건 제 일이 아닌데요...”
“청소 아주머니들이 바빠서 너한테 좀 도와달라는 건데, 젊은 애가 이 정도도 못 하겠으면 당장 그만둬. 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 나니까!”
매니저의 노골적인 적대감은 고인성이 그녀를 찾았던 그날부터 시작됐다. 그전에는 고인성이 또 찾아올까 봐 감히 해고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럴 염려가 사라지니 송유리를 쫓아낼 구실을 찾고 있었다.
송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도울게요.”
“빨리 끝내. 오늘 밤 영업에 영향 주면 안 돼.”
결국 송유리는 청소 아주머니들과 함께 밤새도록 방을 치웠고 모든 일을 끝냈을 때는 이미 새벽 네 시가 넘어 있었다.
하루 종일 일한 것도 모자라, 고된 청소까지 마치고 나니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내일은 침대에서 못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핸드폰에는 황이진이 보낸 메시지가 가득했다.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오늘은 세 시에 끝난다고 했잖아.]
송유리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지금 가요.]
비트 타운을 나와 택시를 잡으려 도롯가에 섰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 낯익은 마이바흐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저 차... 지난번에 고인성 씨가 타고 왔던 차랑 비슷하네. 하지만 여긴 돈 많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비슷한 차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
송유리는 눈길을 거두고 택시 호출 앱을 켰다.
그 순간, 차가 천천히 시동을 걸더니 부드럽게 다가오더니 바로 앞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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