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엘이 피임약을 먹고 쓰러졌다는 말에 강기준은 순간 멍해졌다. 머릿속에서 피임약이라는 단어가 반복되었다.
다시 확인하고 싶었지만 배소윤은 이미 전화를 끊어버린 뒤였다.
강기준의 옆에 있던 정아름도 이 대화를 들었다. 그녀는 충격을 받은 듯 강기준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지금 라엘 언니가 피임약 먹고 쓰러졌다고 했어?”
강기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진대로 가봐야겠어.”
강기준은 망설임 없이 병실을 나섰다.
정아름은 그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당황한 듯 이정아를 쳐다봤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기준 씨랑 언니는 관계를 가진 적도 없는데 언니가 왜 피임약을 먹은 거예요?”
이정아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나도 잘 모르겠어. 이 일은 엄마가 확인해 볼게.”
...
강기준은 거침없이 차를 몰아 서진대학교 보건실로 향했다.
“드디어 왔네요! 빨리 라엘이 좀 봐요!”
배소윤은 강기준을 침대 앞으로 끌어당겼다.
강기준의 시선이 침대 위의 정라엘에게 닿았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미세하게 떨고 있었으며 아픈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정라엘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라엘아, 정신이 들어?”
배소윤이 서둘러 정라엘을 부축해 앉혔다.
그때 강기준을 발견한 정라엘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기준 씨가 왜 여기 있어?”
강기준은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긴 다리를 곧게 뻗은 채 서 있었다.
“소윤이가 전화했거든.”
그 말에 정라엘은 배소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윤아, 너 설마...”
그러나 배소윤은 그녀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너 피임약 먹고 알레르기 반응까지 일으켰어! 당연히 강 대표님 불러야지! 이건 반드시 강 대표님이 책임져야 해!”
그러고는 강기준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
“피임약이 원래 여자 몸에 좋지 않은 거 아시죠? 그런데 라엘이는 거기에 알레르기까지 있는데, 애초에 애를 갖기 싫었다면 강 대표님이 피임을 제대로 했어야죠! 그랬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잖아요! 왜 라엘이만 고생해야 하냐고요!”
‘그러니까 지성이랑 자고 피임약 먹은 거네. 근데 피임도 안 했어?’
강기준의 눈빛에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와 조소만이 남아 있었다.
“왜 피임약 먹었어?”
그의 질문에 장라엘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임신하고 싶지 않았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강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더없이 냉소적인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잘했어. 우리 각자 즐기면서 사는 거니까. 하지만 한 가지 알아둬. 네가 누구 애를 가졌든 간에 나한테 책임 물으려 하지 마. 그런 거 절대 인정 안 하니까.”
순간 정라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 애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마음속에 남아 있던 미약한 온기가 사라지고 차디찬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강기준이 그녀와 자고 질려버렸대도 상관없었다. 그녀 역시 그를 붙잡고 책임을 요구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상처 주는 말을 해야 했을까.
강기준은 무심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런 짓을 하고도 부끄럽지 않아서 전화한 거야? 앞으로 두 번 다시 연락하지 마.”
그 순간, 정라엘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강기준은 상대를 짓밟고 모멸감을 주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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