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나는 민박으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정다연을 찾아갔다.
사실 참 어색한 상황이었다.
소녀 정다연이 하필 그녀의 전 남자 친구한테 한눈에 반했는데, 당사자가 대놓고 찬물을 끼얹었고 대놓고 정다연한테 창피를 준 것도 모자라, 일부러 자신을 끌고 허접한 연기까지 벌렸다.
그녀는 활발하던 정다연한테서 처음 그렇게 무기력하고 무너지는 표정을 보았다.
정승철이 그 모습을 봤으면 아마 마음이 너무 아팠을 것이다.
그럴수록 강유나는 진영재가 더 미웠고, 정씨 집안사람들한테 미안했다. 이곳에서 그들만 그녀를 진심으로 잘해줬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담담하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굴 수 없었다.
감정은 원래 사적인 일이었다.
네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다고 날 사지로 몰아세우면 안 돼, 내 진심을 웃음거리로 삼으면 안 돼.
이건 모두 말을 너무 모질게 하는 진영재의 탓이었다. 그가 체면을 봐주지 않았고 안하무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강유나는 진영재가 정말 냉혈인간인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게 되자 그녀는 그딴 쓰레기한테 10년이라는 세월을 낭비한 게 너무 원통스러웠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욕했다.
"정말 멍청해."
강유나는 1층 복도의 끝으로 가서 정다연의 방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노크하려고 손을 든 순간 어색함을 느꼈다. 정다연이 젊은 여자애였기에 진영재 때문에 수치를 당해 자존심이 무너져서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을 수 있었다.
특히나 진영재와 사귀었던 당사자인 그녀를 더욱 안 보고 싶어 할 수 있었다.
강유나는 망설이다가 손을 거두고서야 2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향했는데, 위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나 언니."
강유나는 걸음을 멈추고 얼른 고개를 들어 보았는데, 정다연이 계단 손잡이에 엎드려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속상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언니랑 얘기해도 돼?"
보아하니 여기서 계속 기다린 것 같았다.
강유나는 거절하지 않고 "응"하고 답하고는 동시에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커다란 유리창 앞에서 그녀는 정다연이 감기가 걸릴까 봐 옆에서 방석을 꺼내주었고 그제야 두 사람은 같이 앉았다.
따듯한 불빛 아래, 정다연의 새하얀 얼굴에 누가가 새빨개져 있었는데 방금 운 것 같았다.
강유나는 이상했다. 진영재가 대체 뭐가 대단하다고, 정다연이 첫눈에 반한 것뿐인데 이렇게 속상해하는 거지?
침묵이 흐르던 중, 강유나가 입술을 오므리고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일은 미안했어."
"언니, 그게 언니랑 무슨 상관이야?"
정다연은 자조하듯 웃었다.
"내가 주제를 몰랐던 거지."
강유나는 정다연이 그때부터 진영재를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를 짝사랑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강유나는 불현듯 그해의 일을 떠올렸다.
당시 진우 그룹이 사업이 부진했기에 진영재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강유나가 그의 명의를 빌어 사회 공헌 기금을 조성하고 활동을 기획했었다.
진영재가 워낙 바빠 현장에 오지도 못했다. 강유나가 애를 써서 사전에 영상을 녹화했고 행사 당일 내내 반복 재생했었다.
그 순간 강유나는 깨달았다. 정다연이 진영재한테 첫눈에 반한 건, 그가 어두웠던 자신의 인생을 구해준 은인이라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진영재랑 무슨 상관이 있어?
현장의 모든 지원자 명단은 그녀가 직접 선별한 것이었다.
강유나는 목이 꽉 막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연아, 혹시 진영재가 한 일이 아닐 수도 있잖아..."
"언니가 내 마음 이해 못 할 수도 있다는 거 알아."
정다연은 강유나가 기분이 상한 줄로 오해하고는 멋쩍게 웃었다.
"만약 내가 오늘 만나지 않았다면 나도 운명 같은 걸 믿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이렇게 왔잖아, 안 그래?"
소녀의 얼굴에 설렘과 기대감이 가득하자 강유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고 문득 마음 한구석에 설명할 수 없는 무력함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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