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 소첩의 말씀을 잠시만 들어주시옵소서.”
강희진은 입가에 어색한 웃음을 머금으며 슬며시 두 걸음 물러섰다.
“폐하께선 본래 하늘이 내린 군왕의 기상을 지니셨으니, 누가 보더라도 범상치 않은 분임을 단박에 알아챌 수밖에 없사옵니다. 소첩이 그렇게 말해야만 그분들이 의심을 거두게 됩니다.”
“허, 과연 그런가?”
선우진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눈을 가늘게 뜨고 강희진을 살폈다.
“정말입니다!”
강희진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진지하게 답했지만 속으론 투덜거렸다.
‘원래 안 움직이는 얼굴이잖아. 그걸 말도 못 해?’
어차피 여긴 황궁도 아니고 자신 말고 선우진의 정체를 아는 이도 없었다.
이곳에서는 황제 앞이라 하여도 모처럼 허리를 곧게 펼 수 있었다. 게다가 복수라 해봐야 그저 말 몇 마디로 분풀이를 하는 셈이었다.
“밥이나 먹자.”
다행히도 선우진은 그 일을 깊이 따지지 않았다. 그녀를 힐끗 본 뒤 곧장 자리에 앉았다.
시골집 밥상은 궁중의 진수성찬에 비할 바도 못 되거니와 선우진은 평소 입이 무척 까다로운 편이라 강희진은 그가 괜히 흠잡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의외로 선우진은 아무 말 없이 젓가락을 들어 정성스레 차려진 반찬들을 맛보기 시작했고 그 모습은 나름 진지하기까지 했다.
“왜 멍하니 서 있는 것이냐.”
선우진은 곁눈질로 강희진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아, 아니옵니다.”
강희진은 급히 정신을 차리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하늘의 뜻을 받들고 백성을 이끌어야 할 자가, 이 나라 백성들이 매일 먹는 밥상을 마다한다면 그게 어찌 임금이라 할 수 있겠느냐.”
선우진은 마치 그녀의 속내를 꿰뚫기라도 하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 말에 강희진은 한순간 멍해졌다.
고집도 세고 성정도 괴팍하긴 하지만 선우진이 좋은 황제인 것만은 분명했다.
재위 중에는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백성들을 잘 보살폈으며 그의 치세 아래 대주국은 실로 태평성대를 누렸으니 말이다.
다만 어째서 그토록 간신인 강상목에게만 마음을 쏟아 그 많은 악행을 눈감아주었는지 그건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강희진은 복잡한 눈빛으로 밥상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떨궜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부인이 네가 이걸 좋아한다고 하던데?”
강희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 후로 며칠간 두 사람은 노만복 방혜령 부부의 집에 머물며 조용히 지냈다.
강희진은 집안일이며 밭일이며 부지런히 일손을 거들었고 그러다 보니 마을 사람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기억했고 그녀 곁에 늘 붙어 있는 잘생기고 게으른 사내도 함께 기억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마누라 덕에 사는 꽃선비. 낮이면 마당에 누워 햇살이나 쬐고 밥만 축내는 사내.
지나가는 이들마다 선우진을 보고 곁눈질을 하고 혀를 차기 일쑤였다.
그런 이야기가 그의 귀에 들어갔을 때, 선우진의 얼굴은 순식간에 시퍼렇게 질렸다.
그날 밤, 강희진은 그를 달래느라 한밤중까지 진땀을 빼야 했다.
이튿날 아침, 노만복이 도끼를 들고 땔감을 하러 산에 간다 하자 선우진이 자기도 따라가겠다며 기어이 나섰다.
강희진은 그의 상처가 덧날까 염려되어 아침 내내 그를 말리고 또 말렸다.
겨우겨우 설득을 마치고 나서야 그는 산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밭에 나가 호미를 들었다.
“일을 어찌나 잘하는지. 겨우 한 시진이 지났을 뿐인데 이 넓은 밭 한쪽이 죄다 그 양반 손을 탄 자리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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