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현무는 한창 격분해 있어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숙빈은 두 팔을 가슴 앞에 모으고는 마치 구경이라도 하듯 흥미로운 눈빛을 띠었다.
“이것 참, 양 장군께서 무슨 일을 벌이시는 겁니까?”
갑자기 맑고 부드러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양현무의 걸음이 멈추자 강희진은 갑작스러운 정지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앞으로 휘청거렸다.
초월이 재빠르게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강희진은 가까스로 안도의 숨을 내쉬고 초월을 향해 은근히 고마운 눈길을 보냈다.
“소첩, 영친왕 전하께 문안 올립니다.”
숙빈이 먼저 입을 떼자 강희진도 서둘러 따라 절을 올렸다.
영친왕 선우영은 선우진과 같은 어미에게서 태어난 친동생이었다.
강희진은 그를 알고 있었다. 겉모습은 마치 서늘한 달빛처럼 온화하고 고결한 군자 같지만 속내는 형과 다를 바 없는 탐욕스러운 자였다.
선우진은 적어도 정당한 방식으로 여인을 품었지만 선우영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뜻을 이루려 했다.
전생에 그가 강원주를 강희진과 착각하고 속이려 들었던 기억이 떠오르자 속이 울렁거렸다.
“어릴 적부터 무예를 익힌 분께선 역시 여인의 연약함 따위야 헤아리지 않는군요. 보십시오, 저 손목을. 얼마나 아팠으면 저리 창백해졌겠습니까?”
선우영은 부드럽게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의 말에는 묘한 날이 서려 있었다.
“이 여인이 후궁을 어지럽히고 정사에 개입하려 하니, 폐하 앞에 끌고 가 심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이를 막으시겠습니까?”
양현무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강희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상황을 관망하기로 했다. 설령 선우영이 다른 의도를 품고 있다 하더라도 이번만큼은 그의 개입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터였다.
“그럴 법한 큰 죄명이군요.”
선우영이 흥미롭다는 듯 천천히 시선을 돌려 강희진을 바라보았다.
숙빈은 가만히 곱씹으며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그가 하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게다가 지금 강희진에게 영친왕이라는 새로운 우군이 생겼으니 자신이 밀리는 형세가 되었다.
더 깊이 생각할수록 불안감이 엄습해왔고 결국 숙빈은 선우영에게 예를 갖춰 인사한 뒤, 양현무의 팔을 잡아끌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점점 멀어지자 강희진은 조용히 눈길을 거두었다.
양현무는 대주 최고의 무장이었다. 만약 그가 정말로 선우진 앞까지 몰고 갔다면 선우진이 과연 자신 편을 들어줄 리 만무했다. 겨우겨우 되찾은 성총이 자칫하면 날아갈 뻔했다.
강희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속으로 안도했다.
“아까는 양 장군이 있어 차마 묻지 못했습니다.”
선우영이 싱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희, 전에 어디선가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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