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빈은 어두워진 눈빛으로 묵묵히 듣고 있었지만 반박은 하지 않았다.
그의 이런 방관에 친구 신도영도, 어머니 김예화도, 비서 허준이나 저택의 도우미도 채시아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신도영은 전화 한 통을 받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난 후 윤성빈은 무의식적으로 휴대전화를 들었지만 채시아의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계속해서 차가운 여성의 안내 음성만 들릴 뿐이었다.
“전화기가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되며...”
짜증이 난 그는 휴대폰을 옆으로 던져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통유리창으로 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른 새벽에 채시아가 후회한다고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윤성빈이 왠지 모르게 씁쓸한 느낌에 목을 가다듬는데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담배 좀 그만 피워요. 건강에 안 좋아요.”
흠칫하며 채시아가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뒤를 돌자 눈에 보이는 건 참한 척하는 임수아였다.
잠시 반짝이던 그의 동공이 금세 차갑게 식으며 물었다.
“여긴 왜 왔어?”
임수아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주머니가 가보라고 하셨어요. 채시아 씨가 다른 사람 만나는 걸 알고 오빠한테 괜한 생각하지 말래요.”
그녀가 말한 아주머니는 윤성빈의 모친이었다.
4년 전 김예화와 신도영이 같은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경쟁사의 습격을 받았다.
김예화는 피를 많이 흘렸고 당시 병원에는 O형 혈액이 부족했는데 마침 채시아도 O형이었다.
신도영을 안정시킨 후 수혈하러 간 그녀는 체력이 바닥나서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당시 채씨 가문이 후원자라는 걸 알게 된 임수아는 채시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쓰던 중, 채시아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용히 돌봐주러 갔다.
그렇게 채시아가 사람을 구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아무도 그녀가 병원에 있는 사이 임수아가 ‘하필’ 사람을 구했다는 명목을 가져갈 줄은 몰랐다.
임수아는 자신이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윤성빈과 결혼할 줄 알았다.
그런데 김예화는 아들의 출세와 권력을 위해 채시아가 난청인데도 채씨 가문과 정략결혼을 제안했다.
지금 윤성빈은 채시아와 관계를 갖지 않아 결혼 3년 동안 두 사람은 아이도 없었다.
늦은 밤, 중환자실 안에서 채시아는 인공호흡기를 끼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다행히 죽지 않고 박지훈이 병원으로 데려와 죽음의 문턱에서 살려주었다.
옆에서 눈물을 흘리는 오경숙을 보며 그녀가 힘없이 위로했다.
“저... 괜찮아요. 울지 마요...”
나약하고 비겁해 죽는 것도 수면제를 먹는 방법밖에 선택하지 못했다.
채시아는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린 오경숙을 바라보며 더욱 괴롭고 미안하기만 했다.
오경숙은 흐느끼며 채시아의 손을 꼭 잡았다.
“시아야, 내 말 잘 들어. 빨리 낫고 앞으로 잘 살아가는 거야. 알았지?”
채시아는 약속을 할 수 없었다.
병원 복도에서.
“대표님, 수술이 끝나고 검사를 해봤는데 임신 2주 차가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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