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밖에서 오경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아야, 깼어? 깼으면 얼른 나와. 너 좋아하는 잔치 국수했어!”
그녀의 말에 채시아는 그제야 어제 병원에서 나왔다가 갑자기 오경숙을 찾아온 일련의 과정이 떠올랐다.
채시아는 어제 있었던 일도 힘겹게 떠올리는 자신에게 괜히 짜증이나 주먹으로 머리를 두어대 때렸다.
그러고는 슬슬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자신이 누워있던 곳에 피가 흥건한 것이 보였다.
이에 채시아가 얼른 오른쪽 귀를 만져보자 축축한 것이 피가 가득 나 있었다.
보청기도 그새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채시아는 당황한 얼굴로 서둘러 피를 닦고는 황급히 새 시트를 꺼냈다.
오경숙은 채시아가 좀처럼 내려오지 않자 괜히 걱정되어 올라갔다가 화장실에서 시트를 빨고 있는 그녀를 보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뭐 해?”
“아, 생리 때문에 피가 좀 묻어서요. 금방 내려갈게요.”
채시아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먼저 그녀를 내려보냈다.
핏물을 다 제거하고 아침까지 다 먹은 후 채시아는 평상 위에 대자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경숙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가 또 어느 순간 모호하게 들렸다.
채시아는 앞으로 그녀의 소리를 영영 듣지 못하는 날이 올까 봐 두려웠다. 또 그 사실을 알게 된 오경숙이 속상해하며 눈물을 흘릴까 봐, 그것도 두려웠다.
이곳에서 반나절 정도의 시간만 보낸 후 채시아는 그간 모아뒀던 돈 일부를 몰래 오경숙의 베개 아래에 두고는 집 문을 나섰다.
오경숙은 이대로 그녀를 보내기 아쉬운지 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채시아가 들어가는 것까지 확실하게 보고서야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배웅해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경숙은 어젯밤에 품에 안았던 앙상하게 마른 채시아의 몸을 떠올리고는 안 되겠는지 선명 그룹에 전화를 걸었다.
비서실은 오경숙의 전화를 받고는 바로 윤성빈에게 보고했다.
오늘은 채시아가 떠난 지 3일째 되는 날이자 윤성빈이 처음으로 그녀와 관련 있는 전화를 받은 날이었다.
윤성빈은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채시아는 결국 3일을 버티지 못했다.
“윤 대표님, 저 오경숙이에요. 어릴 때부터 시아 돌봐줬던.”
“네.”
“바쁘실 테니 본론만 얘기할게요. 대표님, 우리 시아한테 상처 좀 주지 않으시면 안 될까요? 우리 시아, 대표님 아니어도 이미 상처 많이 받은 아이예요. 태어나자마자 난청이라는 이유로 사모님한테 예쁜 소리 하나 못 듣고 자랐는데 어떻게 마음이 단단할 수 있겠어요. 아주 어릴 때 저랑 같이 지내다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 다시 본가로 돌아갔을 때 거의 매일 울면서 저한테 전화했어요.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자신을 예뻐해 주지 않는다고요. 차라리 내 딸로 사는 게 더 낫겠다고 하면서요... 어르신께서 돌아가신 지금, 시아가 도항시에서 제일 의지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은 이제 대표님밖에 없어요. 그러니 제발 우리 시아 좀 예뻐해 주세요. 제가 이렇게 부탁할게요.”
윤성빈은 울먹거리는 오경숙의 목소리에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왔다.
“어제는 돈으로 날 모욕하더니 이제는 방법을 바꿨나 보죠? 불쌍한 척하면 내가 가엽게 여길 거라 생각했나 본데 절대 아니라고 전해주세요.”
윤성빈이 차가운 목소리로 쏟아 붙였다.
“그리고 채시아가 어떻게 살아왔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 다 본인 업보니까 알아서 잘 살라고 하세요.”
그는 이 말을 끝으로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오경숙은 윤성빈에게 기대했던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늘 채시아가 좋은 말만 들려줘서 좋은 사람이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윤성빈은 채시아와 어울리는 짝이 아니었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채시아는 진동음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혼하자며? 내일 10시에 봐.]
윤성빈이 보낸 메시지였다.
채시아는 오랜만에 받는 그의 메시지에 잠시 넋을 잃어다가 금세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답장을 보냈다.
[네.]
윤성빈은 답장으로 돌아온 짤막한 한마디에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 끝까지 해봐.”
일할 생각이 갑자기 확 사라져버린 그는 외투를 챙기고 클럽으로 향했다.
클럽에 도착해보니 친구들뿐만이 아니라 임수아도 와있었다.
“다들 오늘 마시고 죽어보자고!”
술 파티가 한창이던 그때 신도영이 윤성빈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채시아랑은 어떻게 됐어?”
윤성빈은 그 말에 표정을 살짝 굳혔다.
“앞으로 채시아 얘기 꺼내지 마. 내일 바로 이혼하고 올 거니까.”
임수아는 그 말에 얼른 술을 한잔 따라주었다.
“안 돼.”
윤성빈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혼이 내일이라 채시아가 어쩌면 지금쯤 집으로 돌아왔을 수도 있으니까.
단번에 거절당한 임수아는 기분이 상했는지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물었다.
“왜요? 어차피 채시아 씨와는 이혼할 거잖아요. 근데 왜 안 돼요? 혹시 오빠랑 나 사이의 일을 채시아 씨가 알게 될까 봐 겁나요?”
그녀의 말에 윤성빈은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하지만 말을 이렇게 했지만 집으로 가기 전에 따로 사람을 시켜 임수아를 집까지 바래다주게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윤성빈은 거의 5분에 한 번 꼴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하지만 집에 다 도착할 때까지 채시아는 그에게 단 한 통의 문자도 보내지 않았다.
청림 별장.
윤성빈은 칙칙하고 어두운 별장 외관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보니 역시 채시아는 없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윤성빈은 조금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세탁실로 들어갔다. 전에 그가 벗어둔 옷은 며칠째 그대로 똑같이 놓여있었다.
그는 그 광경을 몇 초간 바라보다 이내 세탁기 안에 넣어뒀던 옷을 전부 다시 꺼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거실로 돌아와 그대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지 이날 그는 간만에 악몽을 꿨다.
꿈속에서 채시아는 온몸에 피를 두른 채로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나 이제 성빈 씨 안 사랑해요.”
윤성빈은 그 말에 눈을 번쩍 뜨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이제 막 밝아진 바깥을 한번 확인하더니 서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씻으러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멀끔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시간이 되자마자 바로 가정 법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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