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저희가 지금 당장 20억을 현금으로 마련하기는 어렵거든요. 분할로 드리면 안 될까요?”
신재호는 얼굴 가득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서승준은 가슴을 쭉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되지.”
“대신, 그 동안은 지수한테 시비 걸지 말고, 여기에 오지 마요. 그리고 회사에도 나타나지 말아 주세요. 지수가 잠시라도 편히 지낼 수 있게요.”
신재호가 이어서 부탁했다.
서승준은 한껏 의기양양했다. 아까 막 도착한 신재호가 회사까지 난동 피우려 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생각도 못 하고, 신이 내리는 선물이라도 되는 양 말했다.
“그래, 들어줄게.”
“정말 감사해요, 아저씨.”
신재호는 활짝 웃었다.
“그 돈은 언제 내 통장으로 들어오지?”
서승준은 더 이상 컵을 닦으러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급하게 필요해서 그래.”
“언제든 드릴 수 있어요.”
신재호는 그제야 본색을 드러냈다.
“근데 금액에 따라 형량이 달라지거든요.”
“...형량?”
서승준이 멍하니 되물었다.
“공갈 협박이요.”
신재호는 두 손을 내보이며 억울한 척했다.
“저희가 돈 안 주면 지수 집이랑 회사에서 난동 부리신다면서요.”
“여긴 내 딸 집이야!”
쉬 가라앉혔던 분노가 다시 치솟은 서승준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가 어떻게 하든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여기는 지수만 사는 집이 아니에요.”
신재호는 거짓말을 능청맞게 이어 갔다.
“저랑 채윤이도 같이 계약해서 지내고 있어서요. 아저씨가 난동 부리면 저희도 피해를 봐요.”
서승준은 방 안을 둘러봤다.
생활용품은 서지수와 진하늘의 것뿐, 다른 사람 물건은 눈에 띄지 않았다.
“계약서라도 보여 드릴까요? 바로 넘겨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신재호의 말투는 진짜 같았다.
“회사가 무너지고 네 엄마가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그 사람이 네 앞에서 나를 욕한 적 있었냐?”
서승준은 한 글자씩 짜내듯 말했다
“오히려 집안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만 했겠지.”
서지수는 잠시 멈칫했다.
“왜 단 한 번도 나한테 화를 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 적 있어?”
그 물음을 그는 잔인하리만치 곧바로 내던졌다.
어릴 적, 그녀는 엄마에게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엄마의 대답은 이랬다.
‘그럴 가치 없는 사람에게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왜 가치 없는 사람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답을 듣기도 전에 엄마는 쓰러져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진짜 이유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네가 자라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는 봤어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삼촌, 이모 같은 친척은 한 번도 본 적 없지?”
서승준은 마지막 폭탄을 던지듯 물었다.
서지수는 단호히 말했다.
“엄마는 고아였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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